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라예보 사건 (문단 편집) === 황위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민족자유적 성향 === 당시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의 실질적 황태자였던 [[프란츠 페르디난트]] 대공은 1906년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의 복잡한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당시 관점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'[[대오스트리아 합중국]]'론을 제창했다. 이는 제국 내의 여러 민족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부여해 독일계, 헝가리계와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는 연방제 형태였다. 이미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재정, 국방, 외교를 제외하면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인 [[동군연합|이중제국 형태]]를 띠고 있었는데 이를 각 민족 단위로 확대하는 안이었다. 이는 독일(오스트리아)계와 헝가리계 민족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특히 헝가리계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지만 반대로 루마니아계, 이탈리아계, 슬라브계 민족들에게는 당연히 큰 지지를 받았다. 이러한 정책은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에게 있어서 제국을 존속시키는 데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. 당시 제국의 인구 분포를 보면 실질적인 지배 민족이었던 독일계의 인구는 25%를 넘지 않았으며 여기에 헝가리계를 합쳐도 50%가 안 되었다. [[프랑스 혁명]]으로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유럽의 민족주의 바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온 유럽에 퍼진 지 오래였으며 이미 제국에서도 [[1848년 혁명]]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동등한 주권을 원하며 크고 작은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. 특히 독자적인 종교적 역사를 가진 [[체코]] 지역은 오스트로-슬라비즘[* 제국 내에 소속된 슬라브족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내에서 동등한 민족적 주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상. 1917년까지 체코인들의 다수는 오스트로-슬라비즘을 따랐다. ]의 주축이었고 [[1848년 혁명]] 당시 제국에 충성하여 헝가리를 진압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제한적으로나마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주권 신장을 위해 [[오스트리아-헝가리-크로아티아 제국]] 방안을 지지하였다. 이러한 이유로 합중국론은 주류 민족인 독일계, 헝가리계 사람들에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으나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필수불가결한 선택과도 같았다. 그러나 [[세르비아 왕국(1882년~1918년)|세르비아 왕국]]의 입장에서 합중국론은 '''치명적인 것'''이었다. 세르비아는 [[유고슬라비아|오헝 제국 내부의 남슬라브계를 규합하여 자국으로 포함하기]]를 원했는데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합중국론으로 인해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내부 영토의 슬라브계가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. 게다가 당시 [[프란츠 요제프 1세]] 황제가 고령이었기 때문에[* 1914년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나이는 무려 '''84세'''로, 당시뿐만 아니라 21세기 기준으로도 초고령으로 간주될 만한 연령이었다. 얼마나 오래 즉위하였는지 당시 황태자인 [[프란츠 페르디난트]]가 50대였을 정도. 실제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사망했고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인 [[카를 1세]]가 즉위하였다.] [[프란츠 페르디난트]] 대공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임박한 상황이었다. 이미 계승 1순위의 지위로도 이렇게까지 여론을 조성하였는데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면 합중국론은 단순히 안건을 넘어 정식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점은 불 보듯 뻔했다. 따라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페르디난트 대공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